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 독립운동 (문단 편집) ==== [[의병]] 운동 ==== 의병 운동은 주로 구한말에 복벽파(왕정복고파)에 의해서 일어났으며, [[경술국치]] 이후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국외로 넘어가서 여러 갈래의 무장투쟁이 전개되었다. 구한말의 의병은 을미의병, 을사의병, 정미의병의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. (호칭은 의병 활동이 일어난 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.) 먼저 을미의병은 [[명성황후]]가 시해된 [[을미사변]]과, 을미개혁의 결과인 [[단발령]] 시행 등에 반발하여 일어난 의병이다. 의병장은 주로 유생층이었으며, [[동학농민운동]]의 잔여 세력 또한 가담하였다. [[고종황제]]는 의병 활동을 무마하기 위해 단발령을 철폐하고 의병에 해산 권고 조칙을 내렸으며 의병들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끝났다. 을사의병은 [[을사조약]]에 반발하여 일어난 의병으로, 특기할 만한 것은 평민 출신 의병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. '태백산 호랑이' [[신돌석]]도 이 시기의 의병장이었다. [[최익현]] 또한 의병을 일으켰으나 관군이 진압하러 오자 "동족끼리 싸울 수는 없다"며 자진 체포당한 뒤 [[쓰시마 섬]]에서 순국하였다. 정미의병은 1907년 [[고종황제]]의 강제 퇴위와, [[정미7조약]]으로 인한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일어난 의병이다. 이때 해산된 [[대한제국]] 군인들이 의병활동에 참가하면서 의병 활동의 규모가 급격히 커졌다. 이들은 연합 부대인 [[13도 창의군]]을 결성한 후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실패하였다. 이후에도 호남 지역의 호남 의병을 비롯해 의병이 활동하였으나, 일제의 [[남한대토벌작전]] 이후 살아남은 단체는 해외로 이주하는 등, 국내에서 조직적인 의병 운동은 채응언을 제외하곤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